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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기획]"천안병천 독립만세기념공원 內 조병옥박사 동상 철거된다."

-제주4.3학살 주도, 아우내 만세운동과 무관

김헌규 | 기사입력 2020/09/08 [18:17]

[뉴스기획]"천안병천 독립만세기념공원 內 조병옥박사 동상 철거된다."

-제주4.3학살 주도, 아우내 만세운동과 무관

김헌규 | 입력 : 2020/09/08 [18:17]

-지난2018년 서울강북구청“제주4.3학살 책임자 조병옥 흉상 건립 철회”

 

▲ 병천 독립만세운동기념공원에 설치된'그날의 함성' 동상 중 조병옥박사로 추정되는 동상이 철거되고 한복을 입은 새로운 동상이 설치될 전망이다.(사진)  © 김헌규

 

독립운동가이자, 교육자, 경찰관, 정치가인 천안 출신 조병옥(趙炳玉, 1894.5.21~ 1960.2.15.)박사의 동상이 철거 될 전망이다.

 

민족문제연구소 천안지회(지회장 최기섭)에 따르면 독립운동 선양사업으로 조성한 천안병천 소재 ‘독립운동만세기념공원’에 설치된 ‘그날의 함성’조형물 중 조병옥박사로 추정되는 것이다.

 

이 동상은 천안시가 성무용 전 시장 재임시절인 지난 2003년경 사업비 8억 여원을 들여 조각가 박민섭씨를 통해가 제작했다는 것이 천안사적관리과 정재학 학예사의 설명이다.

 

철거의 위기에 놓여 있는 문제의 동상은 뒷편에 양복을 입고 나비넥타이를 한 형상이다.

 

이 형상은 1947년 3월 1일 경찰의 발포사건을 기점으로 1948년 4월 3일 발생한 봉기로부터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 충돌과 진압 과정에서 민간인들이 희생당한 사건으로 당시 책임자였던 군정청 경무부장인 조병옥이다.

 

이런 이유로 민족문제연구소 천안지회가 지난해 11월 천안시의회에 관련자들과의 자문회를 요청, 그 결과,“양복을 입고 나비넥타이는 조병옥 박사의 상징으로 오해의 소지가 있어 문제의 동상을 철거를 결정했다.”고 알려지고 있다.

 

하지만 당시 천안사적관리과 정 재학 학예사의 주장은 다르다. 정 학예사는“이 동상은 당시 만세운동에 참여했던 유 관순 열사를 비롯한 조 인원 선생, 김구응 선생 등을 부조형태로 조각한 것으로 여성, 주부, 학생 등 다양한 계층을 형상화 했다.”고 밝히면서 조 병옥 박사는 아니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부조 중 누워있는 형상은 당시 만세운동에 참여한 특정 인물이 아닌 ‘조국(祖國)’을 의미하는 것이고, 총탄에 맞아 쓰러진 사람을 부축하는 '어머니'의 모습은 나라의 위태로움을 표현한 것”이라고 덧붙였다.

 

만세운동이 일어날 당시인 1919년엔 조병옥박사는 미국에 유학중이었고, 만세운동에 참여하지 못했다.

양복에 나비넥타이를 했다고 해서 조병옥박사라고 단정 짓는 것은 문제가 있다며 당연히 그 동상은 조 인원 선생이라고 정 학예사는 주장하고 있다.

 

그러면서 그는“오해의 소지가 있다하더라도 굳이 다 철거하는 것은 낭비"라면서" 잘못된 부분만 일부 수정하면 된다."고 철거에 부정적인 의견을 견지했다.

 

이로써 조 병옥박사라고 추정되는 동상은 철거하고 한복을 입힌 동상이 세워질 전망이다.

 

하지만 새로 세워지는 동상은 조 인원 선생이 꼭은 아니라는 것이 정 재학 학예사의 설명이다.

 

정 학예사는 결국 이 철거와 관련해"천안시가 추경으로 8000만의 예산을 세워 올해 안에 철거할 계획이었다.”면서“하지만 코로나19여파로 예산은 삭감됐고 2021년에 철거될 전망“이라고 밝혔다.

 

한편 지난2018년에 서울강북구청에서도 조 병옥박사의 흉상을 건립하려 했지만 많은 이들의 반대로‘제주4.3학살’책임자인 조 병옥 흉상 건립은 철회됐다.

 

민족문제 연구소가 이번 철거를 요청하게 된 주된 이유는“병천의 3.1만세운동을 주도한 것은 김구응과 조인원(조병옥박사 부친)”이라며“공원에 조성된 ‘그날의 함성’동상은 당시(1919년) 미국 유학중인 조병옥을 세운 것은 역사를 왜곡시키고 아들이 부친의 공을 가로채는 패륜적 결과”라는 주장을 시가 받아들린 것에 따른 것이다.

 

또 연구소는,"당시 공판기록을 보면 조인원선생은 군중 속에서 시위를 구경하고 있었고 김구응선생은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주도한 것으로 돼있다.”면서“ 바로 잡아야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민족문제연구소 최기섭 소장은“독립선언문을 낭독했다는 증거는 1900년에 중앙일보에도 실렸다.”면서 당시의 기사를 제시했다.

 

기사는 조 병옥박사 당질(사촌 형제의 아들)인 조만형씨의 말을 인용하면서“1919년3월1일 아우내장터 만세운동은 김 구응선생과 조인원선생, 유관순열사가 앞장섰으며 시위 군중 앞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사람은 김구응선생 이라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김구응선생은 3천명의 군중 앞에서 독립선언문을 낭독한 직후 일제의 무차별 총격으로 머리에 총을 맞고 쓰러졌고, 개머리판과 총검으로 난자당해 (현장에서)즉사했다."고 기사는 밝히고 있다.

 

또한 지난2006년 전해주라는 분이 '성공회 병천교회 3.1아우내만세운동에 대한 기록'이라는 제하의 석사 논문에는 김구응선생에 대한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이 논문에 따르면 김구응선생은"1915년 수신면 장산리에 위치한 감리교에서 운영한  장명학교에서 (일인교장)밑에서 교사생활을 했고 1918년에는 성공회가 운영하는 진명학교 교사를 했다."고 기록돼 있다.

 

또 청신의숙(학교명 의숙)이라는 교육기관을 만들어  신학문을 가르쳤다고도 전하고 있다. 

 

그리고 논문은"진명학교 재직 1년 후 1919년 아우내 만세운동의 거사계획을 세우고, 주역이 됐다."고 밝히고 있다.

 

이에,임명순 향토사학자는"자기들(성공회)의 주장일뿐 아우내 만세운동에 참가한 명단과 재판기록,일본인이 작성한 범죄인 명부에는 김구응의 이름이 나오지 않고 있다."면서 주도나 주역이라는 것은 맞지 않다고 밝혔다.

 

그러면서"당시 만세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은 태형을 맞았다는 자료가 있고고, 이 태형을 맞은 사람들은 유관순열사의 생가인 용두리 사람들이 대분분 이었다."며"김구은 선생의 고향인 가전리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며 이것으로 보아 김구응 선생이 만세에 참가했다는 근거와  자료는 아무대도 없다고  밝혔다.

 

또, 정 재학 학예사는 이런 주장에 대해“또 국가기록원에도 이렇게 주장하는 것에 대해 아무런 기록과 증거는 없다.”고 선을 그었다.

 

하지만 조병옥 동상철거와 관련해서는"누가 보더라도 조병옥 박사의 모습이 맞다."면서"철거돼야 된다."고 밝혔다.

 

누구 주장이 맞고, 그르던 그날의 만세운동으로 독립을 이뤄냈고 우리는 그들을 존경하고 추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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